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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유도회 창원지부 선진지 탐방과 함께한 고령·성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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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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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대가야 능을 탐방하는 모습
10월 26일 성균관유도회 창원지부(회장 강용수)는 괴질이 멈칫거림에 유림선진지 탐방을 경북 고령과 상주 일원으로 정하고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빠듯한 일정을 가졌다.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유림 창원지부 회원들은 경북 고령의 대가야박물관을 비롯해 악성 우륵박물관 및 초대 성균관유도회장 겸 성균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 유림의 생가를 방문했다. 또한 성주향교를 방문했으며, 우리나라 태실(胎室) 문화를 알기 위해 세종대왕 왕자 태실지인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번지도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유학(儒學)의 도가 동쪽으로 옮겼다는 「도동서원」을 둘러서 창원으로 늦은 귀가를 했다.
강용수 회장은 “오랫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유림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활기차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어 회원들의 기운도 살리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기회를 얻고자 오늘의 행사를 어렵게 마련했다며 오늘의 행사가 회원들 모두에게 뜻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며 인사를 했다.

국내유일의 순장 왕릉 지산동 44호분의 내부 모습
첫 번째 방문지는 선사문화의 중심지이자 대가야의 도읍지이면서 국내 유일의 순장(殉葬) 대가야왕릉전시관이 있는 지산동고분군에 도착해 문화유산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살펴보게 됐다. 지산동 고분군은 길이 2.4km, 너비 100~200m, 면적 830.181m²의 넓은 범위에 700여기의 봉토분과 작은 무덤 수만기가 분포하는 세계적인 선사유적이다.
문화유산해설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국이라는 4개의 국가가 존재했고, 초기 가야 문명은 김해의 금관가야가 이끌었고 후기는 고령의 대가야가 이끌며 발전하다 신라에 귀속됐다.”한다.

악성 우륵박물관
두 번째 방문지는 악성 우륵박물관으로 가야금을 창제한 우륵의 업적을 알리고 가야금 제작과 가야금 연주 체험을 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가야금 박물관이다. 우륵박물관은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고유 악기인 가야금을 제작하던 금장지(琴匠址) 일원에 건설했다. 박물관을 중심으로 가야금의 주재료인 오동나무를 말리는 과정이 색다른 풍경인데, 25년 이상 된 오동나무를 켜서 5년간 햇볕에 말리는 전 과정이 그대로 보인다.

우륵박물관 주위에 오동나무를 말리는 모습

심산고택에서 강의 중인 강용수 회장
세 번째로 찾아간 성주군 대가면의 칠봉마을은 독립운동가 이면서 초대 성균관유도회장 겸 성균관장과 성균관대학 초대학장을 지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선생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칠봉마을은 심산선생 외에 동강 김우옹(1540~1603), 한강 정구(1543~1620)가 탄생한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독립유공자 직산 김창열선생 기념비와 열부창녕조씨행록을 기록한 려각閭閣이 있다. 마을 안쪽에는 심산고택과 청천서당 및 동강선생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이 위치한다. 특히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1호인 청천서당(晴川書堂)은 심산선생이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수리하여 이름한 성명학교(星明學校) 현판이 아직도 걸려 있다. 선생의 후손은 “독립운동의 결과 재산은 사라지고 집 한 채도 없이 삶을 살아야 했던 험난한 일상이었고 결과 후손들도 힘들게 살아야 했다.”며 독립 후손가의 힘든 생활상을 이야기했다.

애국계몽운동의 산실인 성명학교

성주향교 모습
네 번째로 찾은 성주향교는 1398년 성균관을 건설할 때 함께 세운 지방 향교로 코로나19 방역 때문에 봉향은 할 수 없었고 성주향교 건물의 특이한 배치 구조를 볼 기회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향교의 배치는 평지에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이고 구릉지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공간배치를 하는데 성주향교는 구릉에 세웠으나 우묘좌학(右廟左學)의 이색적인 배치법을 사용한 점이다. 또한 대성전은 17세기 초의 건물로 처마끝 공포의 형식이 다포식으로 보기 드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성주향교 배치도

세종대왕자 태실
잠시 성주역사테마공원을 들렀다가 선석산 아래 위치한 태봉(胎峯, 해발 258.2m) 정상부에 있는 국가 사적 제444호 세종대왕자 태실을 둘러봤다. 이 태실은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한 태실 등 모두 19기가 군집하고 있다.
태실은 세종 20년에서 24년 사이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19기 중 14기는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나, 수양대군(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을 파괴해 남아 있지 않았다. 이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세조의 태실 앞쪽에는 임금의 태실인 태봉(胎封)으로 봉하고 가봉비(加封碑)를 세웠다. 조선 최고의 명당에 건설한 왕자의 태실은 세조의 욕망으로 인해 훼손됐다. 이 사건은 명당에 의존한 조선왕조를 왕조 스스로가 부정한 행위로 결국 조선의 멸망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 유림 지도자들도 새겨 명심해야 할 문제이다.

단종의 태실에서 본 풍경

도동서원에서 기념촬영
마지막으로 창원으로 돌아오면서 들렀던 도동서원은 사적 제488호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조선 5현(五賢)의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향사한 서원으로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불렀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4년 지방의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불렀다. 1607년선조가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했으며, 서원의 기둥에 흰 띠를 두른 것은 수현서원(首賢書院)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도동서원은 이색적이고 섬세한 건축 양식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것들을 다 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언제나 시선을 끌던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 노거수를 뒤로 하고 늦은 시간에 창원에 도착했다.
경남공익기자단 강창원 기자 ( win69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