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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향토사연구회와 함께한 육신사 답사

win690

2021-11-1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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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 안내도
코로나19의 여파로 답사를 가지 못했던 대다수의 단체가 정부의 집합 금지 완하로 미뤄왔던 답사와 행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창원문화원은 회원들과 창원향토사연구회를 주축으로 달성군 육신사 답사를 진행했다.
6대의 버스 중 3호차를 배정받은 창원향토사연구회원들은 오랜만의 답사로 즐거워하며 창원만남의 광장을 떠나 육신사로 향했다.

육신사 기념관
육신사六臣祠는 달성군 하빈면 묘리 640번지에 위치하며 비운의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사육신 중 유일하게 자손을 남긴 박팽년의 후손이 박팽년을 위해 세운 사당이었지만 현손玄孫 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을 앞두고 다섯 어른들이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고 난 후 육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게 됐다.
처음에는 숙종 5(1679)년에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사육신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삼가헌 뒤쪽에 절의묘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하빈사를 지어 제사 지내다가 숙종 20(1694)년에 ‘낙빈’으로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에 훼철되어 묘골마을 뒤편에 박팽년의 후손이 지은 육신사가 대신해 제사를 봉행했다. 1974년부터 1975년에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에 의해 지금의 육신사를 건립하였으며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구했다.

육신사 앞의 홍살문
묘골마을은 구한말까지 300여 호의 집들이 꽉 들어차 있었으며 광복 전까지만 해도 100여 호가 있었지만 지금은 30호가 남아 있지만 초가집이 아니라 전통 기와집들이다.

충효당 모습
마을 입구의 주차장 앞에는 사육신기념관이 자리하고 마을 입구에 접어들면 박팽년의 7세손 금산군수 숭고崇古가 별당으로 건립한 충효당이 있는데 예전에는 마을 청소년에게 궁도와 마술을 가르쳤고 부녀자에게는 법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도곡재 모습
마을 중앙 즈음에는 박문현이 지었다는 대구유형문화재 제32호 도곡재陶谷齋가 위치하는데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면서 호를 따서 도곡재라 한다. 박종우朴宗佑은 달성 10현 중 한 사람으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평생 지은 글을 태우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부르며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도곡재는 재실로 사용하면서 왼쪽에 퇴칸을 달아내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안채·사랑채·대문채 등 3개의 권역으로 배치를 이루고 있어 남부지방 양반 가옥의 모습을 보여 준다.

태고정 모습
마을 위쪽을 오르면 외삼문인 육신사라 편액한 솟을삼문이 있고 외삼문을 들어 서면 계단 위에 홍살문이 우뚝 섰다. 마당의 정면에는 사육신死六臣을 기리는 육각형의 비석이 우뚝 솟았고 뒤편에는 육신사가 위치한다. 마당의 우측에는 선비들의 회합장소인 보물 제554호 태고정이 있는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건립한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일부만 남았다가 광해 때 복구했다. 대청 위에는 유두수가 새긴 시 한편과 명나라 선부관이 남긴 현판 등이 걸려 있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자형 건물로 각각 2칸씩 대청마루와 방을 꾸몄다. 일반적으로 정자 건물에서 부엌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윤두수의 시판
亂後人家百不在 난 후에 인가는 백에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數間祠宇倚山根 두어 칸의 사당이 산기슭에 있네
神明自是蒼天佑 신명도 감동하여 하늘도 도우시니
虜火何能震廟魂 오랑캐의 병화를 사당의 혼이 꾸짖어 능히 벼락 칠 것인져.
경남공익기자단 강창원 기자 ( win690@hanmail.net)